2007년 06월 04일
그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니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니가 부딪히고 있는 부분이 뭐야? 도대체 니가 화가 나고, 쏠리고, 소리치고 주장하고 싶은 주의가 뭐야? 없어? 몰라? 그런 게 아니야? 넌 무슨 생각으로 사는 놈이냐! 도대체- 민주화, 민주주의, 독재타도, 미군철수, 파쇼머저리들, 극우꼴통! 이런 거 우려먹기도 많이 우려먹었잖냐, 니가 말하려는 게 이런 거잖아- 아니야? 그럼 뭐야, 뭘 하자는 거야...? 그래- 그럼, 니 지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냐? 지점... 좌파냐, 중도좌파냐, 중도 우파냐, 우익이냐, 그런거 있잖아. 그런거 모른다고? 아이구 이 무식한 자식아. 지금 생각해봐, 사랑 타령이나 감성적인 소재들 있잖아~ 너 좋아하는 거, 삼백육십 일 남녀상열지사에 목매는 녀석이 왜 난데없이 먼 놈에 민주화구 민주주의구 민주언론이구 지랄이냐구~"

"힘든 일 모진 일 다 겪은 사람들이 정신놓고 살아서 지금 조용한 게 아니라고, 이 어린 노무 자식아. 알고 말고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할 거 아니냐구. 학생운동이라는 거 개념도 이해를 못하고, 겪어본 적도 없잖아! 너 그 계파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공부! 투사가 되려면 이론부터 무장이 되어 있어야지- 함부로 입에 담아서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는 거야!"

"솔직히 니가 뭔 좀 아냐? 그래 안다고 쳐- 그렇다 치고 말야. 그 깊이와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겠냐 말이다, 내 말은. 난 자식아, 니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안 그럼 내가 이런 얘길 왜 하겠냐, 어?"

"임마, 술 먹다 말고 어디가?"

"택시!"

"포이동이요."

"아저씨, 담배 한 대 피워도 돼요?" "예에, 그러세요."

"근데 뭐하시는 분이야?"

"만화 그려요."

"아, 나도 만화 진짜 좋아해~ 소싯적에 그림 좀 그렸다우."

"근데 뭘 그리시는가?"

"7, 80년대 어려웠던 사람들..."

"그래... 어려웠던 사람들... 다 어려웠지. 다~ 근데 젊은 사람이 뭘 그런 얘길해~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예전에요... 많은 사람들이 군사정권에 쫓기구 고문당하고 불쌍하게 살았거든요... 이유도 없이요... 그래서요~"

"거!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어린 친구라 잘 모르겠지만 잡힌 사람들 대부분은 다아 빨갱이였고 간첩이었다고-"

"물론 어쩌다가 한두 명은 억울한 사람도 있었겠지."

"그렇다고 사정 다 봐줬으면 이렇게 먹고 살 만한 세상이 왔을 것 같애? 인권이네, 뭐네 해도 박통 없었으면 이렇게 못살지, 암-"

"......"

"그래, 군대는 다녀왔수?"

"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어른이여."

"그래... 제목은 뭐유?"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라고..."

"미치면 미치지, 왜 조용히 미치나- 허허... 밥 굶으면 조용히도 못 미쳐요."

"아저씨, 조기 신호등이요."

"으응..."

"학생!"

"저기... 나도 끌려가고 막 고문당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그 시절 힘들었다면 힘들었던 사람인데... 만화에 나 같은 사람도 넣어줄 수 있나?"

"......네, 그럼요!"




2006년 12월 26일 초판 1쇄 인쇄. 발행. 지은이 이정익. 도서출판 길찾기. 9,800원.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다. 부제는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위의 대화들은 이 책의 에필로그의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택시기사에게 네, 그럼요! 라고 말하는 작가의 얼굴은 선 몇으로 그려졌음에도 너무도 무겁다. 그 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그의 뒷모습도 무겁다.

나는 대학에서 만화를 전공했고, 지금까지 만화를 그려오고 있다. 스스로 만화가라 자신을 소개하기에 부끄럽게도 정식 데뷔도 못한 터이지만, 여하간 그렇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화판이 어캐 굴러가는지 좀은 안다. 아니, 분명히 말하자면, 인기작을 그리지 못하거나 주위에서 백수 소릴 들으면서도 바득바득 만화를 그리겠다는 바람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캐 살아가는지 좀은 안다. 만화 천자문의 히트를 알고, 넘쳐나는 웹툰을 안다. 인기작을 그려 이름을 날리는 친구도 있고, 고만고만한 그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친구도 있다. 회사에 들어가 일하는 친구도 있고, 만화 그리기를 완전히 떠난 친구도 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 그래서 [삼백육십 일 남녀상열지사에 목매는 녀석이 왜 난데없이 먼 놈에 민주화구 민주주의구 민주언론이구 지랄이냐구~]같은 말이 이정익 작가에게만 향하는 말같이 들리지 않는다. 남녀상열지사나 일상, 판타지를 그려내는 작품들이 의식이 없거나 깨어 있지 않다고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나는 주말에 찾아간 영화관에 <여섯개의 시선>이 걸린 것을 짜증스러워 하며 주말에까지 그런 걸 보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던 어느 인기 웹툰과, 조까튼 세상 어찌 되든 비웃으면 땡이라는 듯한 시선들과 오늘도 마주친다. 모두 선량하고 유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무지가 다시 밤길 신호등을 건너 귀가하는 누군가의 어깨에 얹힌다.

책은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제는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이지만 책은 근현대사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보다는 인권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 극렬했던 박정희 정권때의 일들과 전두환 정권 때의 5.18항쟁을 짚어 이야기한다. 목차는 이렇다.

prologue
1장 광주 대단지 사건
2장 동일방직 분뇨 사건ㆍ인혁당 재건위 사건
3장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
4장 유신정권의 그림자-고문공화국
5장 광주 민주화 항쟁
epilogue


목차에 열거된 사건에 대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까? 잘은 모르긴 몰라도 뭔가 들여다보면 화낼만한 일이겠지, 그렇지만 옛날에 지나간 일이지, 지금도 저런 일이 나 모르는 어딘가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거나 하다고는 잘 안 와닿는데. 지나간 일 일일히 캐서 나만 여기 이렇게 정의롭다고 하는 사람들 좀 보기 그렇지 않나? 박정희 시절이 끔찍했다고는 하고, 또 뭐 보자니 대강 그런 거같긴 한데, 지금은 박정희 같은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다시 그렇게 될 것같지도 않은데?

그래. 박통시절은 갔지. 전통시절도 갔고. 많은 것이 옳게 바뀌었고, 또 바뀌어 가고 있지.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은 아직 있고, 빨갱이 운운도 심심찮고, 어딘가에선 바로 한 달 전에 박정희 숭모전이 열리고, 교과서에서 저런 사건들은 몇 줄도 보이지 않지. 학교는 '일부러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왜냐면,
아직 저같은 사건들을 정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사회도 학교도 국가도 '사실 그들의 근본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점이야. 저와 같은 사건들은, 학교가 성적위주로 가르치다보니 어쩌다 빼먹거나, 가르칠 시간이 없어서 한 두 줄로 줄인게 아니야. 알려질 필요가 없어서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야. 알려져야 할 일들이, 알려지지 않도록 지침되어 왔기 때문이야.


작가는 '다들 모르지만,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우리는 불같이 분노해야 하며, 일어나 ○○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그림으로 옮겨낸 일들에 대해 '너무나 너무나 두려워서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라 말하며, 몹시도 두렵고 아팠던 시대를 '견디어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옛날'에 대해 당신이 알길 바란다. 당신이 눈을 돌리는 그때에 예전의 그 끔찍했던 나날들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기에. 학교도 누구도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몰랐던 일들, 누군가가 우리가 모르고 살아가길 바랐던 어떤 '옛 일'들은 우리와 우리가 살아갈 더 나은 나날들을 위해 알아야 할 일들이기에.


by laystall | 2007/06/04 21:50 | 02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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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옛날'에 대해 당신이 알길 바란다. 당신이 눈을 돌리는 그때에 예전의 그 끔찍했던 나날들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기에."   한 번에 달걀 네 개도 부담없이 부쳐 먹을 수 있는 여 ... more

Commented by scarab at 2007/06/04 22:20
내일 구입해야겠슴다(안 보면 안될것 같슴다ㅜ_ㅜ)
Commented by 늬소 at 2007/06/05 00:47
사실 정보는 알려면 알 수 있지만 글을 읽고 다큐를 봐도 뭔가 화나기도 하고 눈물이 울컥하기도 하지만 와닿지 않을 때도 많은데 그 시절을 안 겪은 사람이 그 시절 얘기를 해준다면 오히려 이해(랄까..)가 잘 될 것 같아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동네노는누나 at 2007/06/08 02:26
요거요거요거!!!
Commented by nippang at 2007/06/15 10:57
저는 어제 '사이시옷'을 읽었어요.
Commented by 머엉ver2 at 2007/06/23 19:09
학교에서 안 가르쳐준다는 사실. 최근엔 그런것만도 아닙니다. 뭐, 그래봤자 선생님 누가 걸리냐에 있다는..(..)
Commented by laystall at 2007/07/08 20:33
scarab /
감상도 함 올려보십셔. :)

늬소 /
이번 '화려한 휴가'가 시사회 등에서 대호평이라는데.. 참 기대됩니다. 영화관 가야지.

동네노는누나 /
감상감상감상!!!

nippang /
아. 그거. 어땠수? 전 표지만 봤구랴.

머엉ver2 /
어떤 성향의 선생님을 만나느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정규교육이 어떻게 가르치느냐의 문제를 말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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